들어가는 글

     + 사회사를 쓰려면 기독교 운동이 탄생한 바로 그 환경에서 보통 사람들이 꾸려 나간 삶의 패턴에 예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환경을 "그리스인들의 불멸성 개념", "로마인들의 천재적 조직력", "헬레니즘 정신", 이런저런 것에 대한 "유대교의 가르침", "신비 종교"와 같이 모호한 일반성의 관점에서 묘사하거나, 고대의 귀족 저술가들이 되풀이했던 일반화와 추상화를 재생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자료와 우리 능력이 허용하는 한,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의 삶이 지닌 재질을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회사가가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시대 지도자와 저술가의 사상이나 자기 이해뿐만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살던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술하는 것이다. 27-28쪽.
 

1장: 바울계 기독교의 도시 환경

     + 바울은 도시 사람이었다. 도시의 숨결이 그의 언어를 통해 전해진다. 예수가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와 가라지 비유, 임차농들, 진흙으로 지붕을 만든 움막은 거름과 흙이 뒤섞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그리스어로 기록된 글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마을에서 사용하던 아람어가 종종 느껴진다. 한편 바울이 감람나무나 정원의 은유를 사용할 때는 그리스어가 유창하게 흘러나오고, 농촌보다는 학교 교실이 떠오른다. 바울은 김나시움이나 경기장, 또는 공방에서 가져온 그리스어 수사의 전형적 표현에 더 익숙한 사람 같다. 42쪽.
     + 지중해 세계 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기까지 여섯 세기 반에 걸쳐 일어난 엄청난 정치 및 사회 변화의 선두에 있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서방 세계에 직접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가져다준 폴리스가 제국의 야망을 채우는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역설을 이미 발견했다. 필리포스는 "자유" 도시 동맹들을 식민지로 삼고 조종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잘 습득했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유명한 그의 아들은 아테네를 새로운 문화 비전을 이끌 견인차로 삼았다. 도시화는 그리스화의 수단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도 같은 정책을 추구했다. 그들은 도시를 세우거나 다시 짓고, 거기에 정식으로 등록된 시민 단체로 이루어진 그리스식 기관(demos), 평의회(boule), 그리고 자녀들을 위한 김나시움 중심의 교육 체계를 세웠다. 47쪽.
     + 로스토프체프(Rostovtzeff)는 이렇게 써 놓았다. "로마 제국은 자치도시들의 연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꿈꾸던 화합(homonoia)보다 현실성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서도 그리스식 도시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식민지가 상당히 쓸모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식민지들은 퇴역 군인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위험 지역에 잠재적 군사력을 공급했으며, 동부 지역의 경제를 되살렸다. 아우구스투스는 퇴역 군인을 파견해 식민지를 세웠을 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을 세우고 다시 짓는 헬레니즘 시대 군주들의 관행을 따랐다. 48쪽.
     + 도시를 형식상 재건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초기의 최고 권력자가 속주의 도시 사람들에게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지방 정부가 강화되었다. 법정에 제소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지역법도 재판 규범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속주 총독이나 황제에게 직접 항소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면서 사법의 일관성도 증진되었다. 이는 심지어 사회 지위가 낮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말 정의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혹은 적어도 소망을 더 널리 퍼뜨렸다. 도로가 건설되고 유지되었다. 지중해의 해적도 거의 소탕되었다. 자유시가 스스로 주화를 발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조세 행정도 안정되어 세금을 더 공평하고 효과 있게 거두었으며, 심지어 일부 사례이긴 하지만, 잠시나마 세금을 깎아 주기도 했다. 그리스식 지방 행정과 교육 제도가 적극 권장되었고, 부유한 시민들이 도시에 기부하는 것도 적극 권장되었다. 49쪽.
     + 바워속(Bowersock)은 아우구스투스가 이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대외 관계에 따른 여러 목적에 활용했던 후견 체계를 아주 노련하게 활용하여 동방 도시의 상류층과 자신 사이에 친밀한 의존 관계를 구축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원수(princeps, 元首)는 지역 귀족들이 자신에게 바친 충성과 공식 영예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업과 그 자식의 사업이 더 윤택해지고 번창하게 만들어 주었다. 강력한 지역 군주가 있어 따로 속주를 조직하지 않아도 되거나, 아직은 로마가 속주를 조직하는 것이 적절치 않았던 지역에서는 원주민 출신의 왕이 로마 원수의 피후견인이 되었다. 완전한 성공을 거둔 예는 아니지만, 헤롯이 그런 사례에 해당하는 유명한 인물이자 전형이다. 헤롯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 세바스테와 가이사랴 마리티마를 비롯해 다른 고을을 세우고 열심히 재건했으며, 안디옥과 다른 외국 도시에 온정을 베풀었다. 이는 피후견인인 왕들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헬레니즘과 다시화를 촉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야망도 키워 나갔음을 잘 보여준다. 50-51쪽.
 

2장: 바울계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내 수준

     + 
 
 

6장: 믿음의 패턴과 삶의 패턴

     + 이 본문들에서 당시의 전형적 회심자들이 이전에 주관적 죄책감에 눌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암시는 없으며, 바울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암시도 없다. 바울은 아주 드물게 자신의 예전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갈 1:13-14; 빌 3:4-6). 434-435쪽.

3장: 아라비아와 다소

     + 어쨌든 바울은 뒤이어 예루살렘으로 간다. 그때는 기원후 36년이나 37년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120쪽.

     + 나는 사울이 그때 다소에서 침묵의 시간을 보내면서 일하고 공부하고 기도하며 한 분 하나님에 관한 더 큰 그림을, 장차 온 세상을 흔들어 놓고 온 세상을 포위하여 공격할 더 큰 그림을 그의 생각 속에 통합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오래전부터 내려온 성경 이야기의 완성이시라면, 그런 결론을 불가피했다. 135쪽.
 

7장: 유럽으로

     + 성경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도덕과 관련된 교훈을 명백히 끌어내는 사례가 거의 없다. 이런 사례의 고전이 바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인 직후에 일어난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다. 둘 사이의 연관성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다윗이 평상시에 성관계와 인생에 보인 태도와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불러온 부정한 성행위 및 살인 사이에는 분명 연관성이 있다. 또 더 행복한 사례라 할 룻기를 보면, 화자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뒤이어 하신 일이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룻과 나오미가 보리를 거둘 때 베들레헴에 도착했다는 말만 들을 뿐이다. 이것이 모든 이의 예상을 뒤집고 룻이 남편을 맞게 될 계기요 방편이었음을 발견하는 건 우리 몫이다. 280-281쪽.
     + 루스드라는 바울이 다리를 저는 이를 고쳤다가 그리스의 여러 신 가운데 하나로 오해받았던 곳이다. 이때 바울은 (그가 아무리 늦어도 기원후 10년에 태어났다고 추정하면)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이었다. 283쪽.
     + 나는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드로아에 도착했을 때 피곤하고 낙심한 채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는 상태에 있었음을 누가가 알았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나는 누가가 바울 일행이 이런 상태에 있었음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누가 자신이 바울 일행에 합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누가의 내러티브가 별안간 '그들'이라 하지 않고 '우리'라 말하는 이유를 단연코 가장 간명하게 설명해 준다. (중략)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떠날 때 디모데와 누가도 함께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누가는 다음 장면에 가서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286쪽 (중략) 298쪽.
     + 물론 다른 이론도 있다. 그런 이론은 늘 있다. 그러나 오컴의 면도날, 곧 추가로 요구하는 가정이 가장 적은 가설을 따르는 게 늘 타당하다는 주장이 지금도 도움이 된다. 따라서 비록 사도행전의 '우리' 본문이 훨씬 후대에 사도행전을 쓴 이가 입수할 수 있었던 자료의 일부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을지라도, 여기의 '우리'가 저자의 서명일 가능성 역시 충분하며, 나는 그렇게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287쪽.
     + 빌립보는 바울과 바나바가 이전의 선교 여행에서 만났던 도전과 종류가 다른 도전을 안겨 주었다. 이 도시는 그 이전에 정착했던 이들이, 그러니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이자 기원전 382년부터 336년까지 마케도니아 왕이었던 필리포스 2세가 세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도시를 세웠다기보다 확장하고 재건했다. 고대에 이 도시는 품질 좋은 금이 나오는 금광으로 유명했으며, 필리포스는 이 금광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었다. 그러나 빌립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로마 내전 초기에 일어났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2년에 벌어진 빌립보 전투에서 2년 전에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버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죽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파했다. 이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이 도시를 한 번 더 확장하여, 이곳에 로마 식민지를 세우고 퇴역 군인들을 정착시켰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갈라디아 남부의 다른 로마 식민지처럼, 로마는 노병들이 이탈리아로 돌아와 성실히 복무한 데 따른 보상으로 토지를 달라고 주장하거나 무턱대고 토지를 점유하는 일이 없게 하려 애썼다.) 287-288쪽.
     + 바울이 살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달리 옥에 갇힌다는 것 자체가 '판결에 따른 형벌'은 아니었다. 옥은 관리들이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동안 그들을 붙잡아 두는 곳이었다. 옥에 갇힌 사람의 복리를 배려한 물품은 전혀 공급되지 않았다. 옥에 갇힌 이가 음식과 다른 필수품을 구하려면 친구나 가족에게 의지해야 했다. 위생 상태도 최악이었다. 쥐 같은 설치류나 해충이 득실대곤 했다. 294쪽.
     + 간수가 공황 상태에 빠졌던 것은 죄수의 탈옥으로 받을 수 있는 처벌 때문이기도 했지만, 바울과 실라가 어떤 종교 문제 때문에 고발당하여 그곳에 있음을 성읍 전체는 물론이요 간수 자신도 알고 있었던 데다, 아마도 격노한 신들이 지진으로 자신들의 불쾌한 심정을 표현한다는 전승을 간수 자신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설명하면, 그의 공황 상태는 물론이요 그가 떨며 던진 이런 질문도 이해가 간다. 그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들, 어떻게 하면 제가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κύριοι, τί με δεῖ ποιεῖν ἵνα σωθῶ;)" 295쪽.
     +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는 '구원'이라는 언어가 서로 다른 몇 개의 차원에서 작동했다. 바울이 귀신을 쫓아내 주었던 노예 소녀는 이 여행자들이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다고 소리쳤다. 로마 제국은 그 백성에게 '구원'을 제공했는데, 이는 전쟁과 사회 혼란, 빈곤에서 구해 준다는 의미였다. 사도행전 뒷부분에 가면, 누가는 파선을 서술하면서, 모든 승선자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아주 구체적 의미이며, 물에 빠져 죽게 직전에 구출되었다는 말이다. 295-296쪽.
     + 재판도 받지 않고 사람들 앞에서 매를 맞고 옥에 갇힌다는 것은 시민이 아닌 사람이나 당할 법한 일이지, 시민이 그런 일을 당했다간 천지가 뒤집힐 사건이었다. 바울이 이를 문제 삼으려 한다면, 이런 일을 한 관리들이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질 것이다. (키케로가 기원전 70년에 베레스를 탄핵한 이후, 로마 관리들은 이 점을 잘 알았을 것이다. 베레스가 저지른 역대급 잘못은 한 로마 시민을 십자가형으로 죽인 일이었다.) 가이우스 베레스는 기원전 120년에 태어나 43년에 사망한 로마 정무관이었다. 시칠리아에서 폭정을 행하다가 키케로에게 탄핵당했다. 키케로는 '베레스를 탄핵함In Verrem'이라는 연설로 주목받는 인물이 되었다. 297쪽.
     + 바울의 다음 기항지였던 데살로니가는 빌립보보다 훨씬 중요했다. 데살로니가는 주요 교차로에 자리하고 있었던 데다, 할키디키 반도 서쪽 테르마이코스만 머리 부분에 자리한 항구로서 수행하던 역할 때문에 번영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의 마케도니아 속주의 수도였으며,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는 로마 내전 때 이곳을 자신의 기지로 사용했다. 데살로니가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 숫자가 회당을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298-299쪽.
     + 아울러 바울이 이 첫 방문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데살로니가에 보낸 첫 서신에서도 신생 교회 안에 여러 신을 섬겼던 이교도가 많이 있었으나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는 분명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그룹이었다. 299쪽.
     +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서 떨어져 있으나 "몸이" 그런 것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그가 그들을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기를 "큰 열망으로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이 어찌나 강했던지,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한 직후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다시 보내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아오게 했다. 디모데는 좋은 소식을 갖고 돌아왔으며, 바울은 이를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여러분이 우리에 대해 늘 좋은 기억을 갖고 있고, 우리가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듯, 여러분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한다고 말해 주었습니다."(살전 3:6) 302쪽.
     +바나바와의 헤어짐, 내내 불안을 달고 다니며 아나톨리아 중부 지방을 오랫동안 뚜렷한 목적도 없이 돌아다닌 일, 새로운 문화권에 이르렀다는 느낌, 사람들 앞에서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면서 받은 충격 등, 모든 것이 바울을 손가락으로만 밀어도 쓰러질 것 같은 취약한 상태에 빠뜨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얼마 전에 잠시 만났던 사람들의 순전하고 평온한 사랑과 도움을 느끼고 복음을 전하는 내내 '가족'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는 깊은 유대를 발견한 것은 틀림없이 바울에게 위로와 힘을 주었을 것이다. 302쪽.
 

11장: 에베소 II

     + 그가 할 일은 자신이 섬기는 교회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마음을 집어넣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가 결국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는 게 드러날 것이다(빌 2:16). 나는 바울이 이렇게 메시아의 마음을 대단히 탁월하게 표현한 것을 한편으로는 그가 예수께 초점을 맞춰 성경을 깊이 묵상한 결과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예수가 보여주신 모범을 본받은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도 역시 무거운 고난을 겪으며 겸비해졌다. 바울은 이것이 바로 예수가 주로서 높이 올림을 받으신 길이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했다. 439쪽.
     + 바울의 이런 권면이 효과를 발휘했던 것 같다. 50년 뒤에 에베소 주교를 맡은 이가 오네시모라는 사람이다. 젊은 날 노예였던 이가 이제 장년이 되어 그리스도인의 지도자가 된 것일까? 아니면 그 이름이 이미 초기 공동체 안에서 존경받는 이름이 되었던 것일까? 454쪽.
     + 바울의 문체와 관련하여 말해 두고 넘어가야 할 것이 셋 있다. 첫째, 이런 일을 컴퓨터로 분석하듯 분석하는 사람들은 대다수 서신이 바울에게서 나왔다고 말하곤 했다. 둘째, 현재 남아 있는 바울 서신은 고대 세계가 내놓은 대다수 문학 작품과 비교하면 사실 아주 짧아서, 우리가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양자를 충분히 비교하기가 분명 어렵다. 셋째, 비평적 학자들은 이런저런 사람이 어떻게 글을 썼는가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할 때 너무 융통성 없이 자신들의 견해만 고집하기가 쉽다.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그 문체에 조그만 변화가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바울 서신에서 볼 수 있는 소소한 문체 변화가 다 그런 경우다. 바울은 에베소서를 쓸 때 특정 상황이나 수신인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일반 서신으로서 쓴다. 456-457쪽.
     + 물론, 진짜 문제는 19세기 이후로 바울 연구의 첨단을 걸었던 학자들이 독일 자유주의 개신교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세계 사람들은 교회를 아주 '높이' 보는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교회관이 '개신교' 색채를 더 많이 드러내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고린도 서신의 견해와 상반된다고 생각했다. 19세기 개신교는 유대 사상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바울이 너무 유대인다운 존재가 되는 것도 분명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역사가이기 때문에 이 시대의 도덕으로 억지 기준을 만들어 세운 뒤, 이 기준에 맞춘 '바울'을 지어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에베소에서 기록되었다고 생각한다. 457-458쪽.
 

14장: 가이사랴에서 로마로, 그리고 그 너머

     + 따지고 보면 60년대 초는 로마와 유대의 관계가 점점 더 긴장 국면으로 접어들던 시기였다. 클라우디우스 치세기에 추방을 당했던 나쁜 기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대 자체를 봐도 최근에 부임했던 벨릭스와 베스도를 비롯하여 자질도 없고 부패한 총독이 잇달아 부임하면서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로마는 지난 백 년 동안 터질 수도 있는 봉기의 움직임을 그때그때 억압하고 진압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도 아주 잘 알았던 '열심', 곧 성경을 연료로 삼아 타오르던 '열심' 때문에 끓어오르던 냄비의 뚜껑을 내리누르는 데만 성공했을 뿐이었고, 이제는 그 냄비가 아예 폭발하려 하고 있었다. 로마에 있던 유대인 공동체도 이 모든 사실을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로마 유대인 공동체의 눈에는 그 동포에 맞서 증언하는 유대인으로서 찾아온 바울이 이런 문제의 일부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더구나 유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항변하러 온 (어쩌다 유대인이기도 한) 로마 시민이 이제 황제 앞에 출두한다면, 골치 아픈 유대인들을 단번에 처리하고 싶어 하는 로마의 욕망에 기름을 끼얹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일이 벌어지면, 클라우디우스가 공포했던 칙령의 메아리를 깨우지 않을까? 그들이 살았던 집과 생업으로 돌아온 지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은 유대인이 다시 한 번 로마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것은 고린도에서 폭도들이 소스데네를 구타할 때나 알렉산더가 에베소에서 군중에게 연설하려 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보았던 일종이 반유대 반동에 불을 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바울도 이런 위험을 아주 잘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일이 현실로 터지기 전에 그 싹을 제거하고 싶어 했다. 614-615쪽.
     +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해는 60년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그해에 그가 로마에 왔다면, 두 해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있었으니, 가택 연금이 끝난 해는 62년이 된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620쪽.
     + 거기서 멈춰도 누가 자신의 목적은 다 이루어졌음을, 다시 말해 하나님나라 복음이 이제 예루살렘과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이어 땅 끝까지 나아갔음을 증언하려는 그의 목적은 다 이뤄졌음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누가의 이야기에서 진짜 주인공은 바울이 아니라 복음 자체다. 그렇다면 거기서 사도행전을 멈추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621쪽.
   + 결국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답은 갈리며, 또 갈린다. 첫 번째 해답이면서 가장 명백한 답은 바울이 64년 로마 대화재에 이어 일어난 그리스도인 박해 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중략) 바울 그리고 어쩌면 베드로도 체포된 지도자 가운데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진짜 원인은 그날부터 오늘까지도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이 재앙의 원인 제공자로 몰려 형벌을 받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중략) 그러나 그렇다 해도, 바울이 64년에 죽임을 당했다면, 누가가 언급하는 2년 뒤에 2년이 더 남는 셈이다. 2년이면 스페인을 방문하고도 남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622-623쪽.
 

15장: 바울의 도전

     + 바울의 경우는 그 출발점이 확실하다. 그의 출발점은 늘 예수였다. 635쪽.
     + 지난 세기 내내 심각한 오해가 있었던 곳이 바로 여기다. 바울 시대에 '묵시주의'라 이름 붙여도 될 만한 견해가 있었다 할 때, 바울도 그런 견해를 공유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바벨론 유수 때 성전을 떠나시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강력한 영광 가운데서 다시 돌아오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이행하시지 않았지만, 갑자기 모든 인간을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며 예수 안에서 당신을 나타내사 미처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 세상과 사람들 속으로 뚫고 들어오셨다고 믿었다. 바울은 이런 일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 그리고 영이 선물로 주어진 사건 때뿐 아니라 그 자신의 사례에서도, 그리고 어쩌면 다른 이들의 사례에서도 순식간에 사람 눈을 멀게 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영광 가운데서 일어났다고 믿었다. 그는 새 창조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미래에 완성되리라고 믿었다. 아울러 그는 예수가 죽고 부활했을 때 위대한 변화가 온 우주에서 일어났다고 믿었으며, 예수가 '다시 오실' 때 또는 '다시 나타나실' 때, 하늘과 땅이 마침내 하나가 될 그때에 엄천난 변화가 일어나리라고 믿었다. 638쪽.

     + 그렇다면 바울의 종말론에 절박한 분위기를 느끼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중요한 점은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그 사건이 어느 때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어떤 특정한 시간 틀 안에서 일어나리라는 것이 아니었다. 한 세대 안에 일어난다던 사건은 세상의 끝이 아니었다. 마가복음 13장과 마태복음 및 누가복음에 있는 평행 본문에 따르면, 그 사건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640쪽.

0. 톺다

- 가파른 곳을 오르려고 매우 힘들여 더듬다.

(예문) 논틀밭틀길도 없는 데를 걸어 본 것은 물론, 눈이 반길이나 쌓인 태산준령을 톺아 넘어갔기 때문에, 실제의 거리로는 천수백 리를 걸었던 것이다. - 출처 <<이희승, 소경의 잠꼬대>>

-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참조]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우리에게 성서(聖書)는 동네 뒷산 보다는 높고 가파른 산입니다. 그래서 오르기도 쉽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손쉽게 오를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정해진 등산로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높고 가파른 산일수록 길을 찾거나 개척하기 위해 힘들여 더듬으며 올라가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한번 산을 오른 후 찾아오는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산을 올라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입니다.

     또, 성서를 읽다 보면 군데군데 틈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것을 기록하고 필사(筆寫)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서의 원본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본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내용적인 틈들을 용인합니다. 틈이라고 하기가 거북하다면 다양함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적인 틈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성서 사이에는 시공간적인 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기에 산을 오를 때 천천히 길을 내거나 개척하며 올라가듯이 성서와 우리의 틈을 잘 메우며 읽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말은 그것을 톺아본다고 합니다.

     앞으로 수요성서공부 시간에 나눈 주제 가운데서 일부를 글로 함께 나누는 작업을 ‘톺아보기’라는 주제로 조금씩 진행하려고 합니다.

 

1. 두 가지 창조 이야기

창세기에는 1장과 2장 두 가지 버전의 창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두 가지 버전을 나누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각각 다른 하나님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엘로힘(אֱלֹהִים)이라고 부르고, 창세기 2장은 야웨(יהוה)라고 부릅니다. 엘로힘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God)’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름이고, 야웨는 오늘 우리가 ‘여호와’로 알고 있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본래 발음에 가깝다고 이해되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는 각각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 창조가, 2장은 인간 창조가 중심 주제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야기하는 순서도 창세기 1장은 ‘하늘과 땅(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에트 하샤마임 붸에트 하아레츠)’으로(창 1:1), 2장은 ‘땅과 하늘(אֶ֥רֶץ וְשָׁמָֽיִם, 에레츠 붸샤마임)’로(창 2:4b) 등장합니다. 1장의 우주 창조 이야기가 하늘에서 숲을 보는 거시적 관점이라면,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땅에서 나무를 보는 미시적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2. 혼돈에서 질서로

창세기 1장은 제사장(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 한 사람인지 여러 제사장의 무리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에서 제사장의 손길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혼돈스러웠던 창조 이전의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1이 하나님의 창조를 선언한 후, 3절에서 창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의 상태를 2절은 ‘혼돈’ 즉 ‘카오스(chaos)’의 상태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땅이나 물 같은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크레아치오 엑스 니힐로)’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서 기자(記者)는 이에 대해서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시라는 겁니다.

     혼돈의 상태였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질서정연하게 되어 갑니다. 모두 칠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는 아주 조직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삼일 동안 하나님은 시공간의 원초적 배경을 만드십니다. 첫째날에는 빛을 지으시고 어둠과 구분하십니다. 둘째날에는 창공을 만드셔서 그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하십니다. 셋째날에는 뭍을 드러나게 하셔서 한쪽으로 모인 물을 바다로 구분하십니다.

     다음 삼일 동안 하나님은 원초적 배경을 채우십니다. 넷째날에는 첫째날에 지으신 빛과 어둠을 주관할 빛나는 것들을 만드십니다. 다섯째날에는 둘째날에 지으신 창공과 물에서 살아갈 날짐승들과 물짐승들을 만드십니다. 여섯째날에는 셋째날에 지으신 뭍에서 살아갈 짐승들을 만드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최종적으로 안식, 즉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누리는 쉼을 향합니다(출 20:8-11; 신 5:12-15). 이 모든 질서정연한 창조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한 말이 바로 족보입니다. 새번역 성서는 족보라는 뜻의 히브리어 톨레돗(תּוֹלֵדוֹת)을 우리말 ‘일’로 번역했습니다(창 2:4a).

 

3. 문화명령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 1:28) 이 중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은 날짐승과 물짐승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명령입니다. 인간에게 덧붙여진 명령은 땅을 정복하는 것과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복하라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 가운데서 인간이 살기 위해 땅을 개간하고 가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봄철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얼어붙은 땅을 일구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질서 있게 잘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농경이나 목축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이 창조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여섯째날에 창조하신 것을 창세기 1장은 집짐승(בְּהֵמָה, 베헤마)과 들짐승(חַֽיְתוֹ־אֶ֖רֶץ, 하예타 에레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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