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톺다
- 가파른 곳을 오르려고 매우 힘들여 더듬다.
(예문) 논틀밭틀길도 없는 데를 걸어 본 것은 물론, 눈이 반길이나 쌓인 태산준령을 톺아 넘어갔기 때문에, 실제의 거리로는 천수백 리를 걸었던 것이다. - 출처 <<이희승, 소경의 잠꼬대>>
-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참조] 네이버 표준국어대사전
우리에게 성서(聖書)는 동네 뒷산 보다는 높고 가파른 산입니다. 그래서 오르기도 쉽지 않지만, 많은 사람이 손쉽게 오를 용기를 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정해진 등산로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높고 가파른 산일수록 길을 찾거나 개척하기 위해 힘들여 더듬으며 올라가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한번 산을 오른 후 찾아오는 성취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산을 올라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입니다.
또, 성서를 읽다 보면 군데군데 틈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그것을 기록하고 필사(筆寫) 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성서의 원본은 없습니다. 수많은 사본들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내용적인 틈들을 용인합니다. 틈이라고 하기가 거북하다면 다양함이라고 이해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내용적인 틈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성서 사이에는 시공간적인 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관점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기에 산을 오를 때 천천히 길을 내거나 개척하며 올라가듯이 성서와 우리의 틈을 잘 메우며 읽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말은 그것을 톺아본다고 합니다.
앞으로 수요성서공부 시간에 나눈 주제 가운데서 일부를 글로 함께 나누는 작업을 ‘톺아보기’라는 주제로 조금씩 진행하려고 합니다.
1. 두 가지 창조 이야기
창세기에는 1장과 2장 두 가지 버전의 창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두 가지 버전을 나누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각각 다른 하나님 호칭을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을 엘로힘(אֱלֹהִים)이라고 부르고, 창세기 2장은 야웨(יהוה)라고 부릅니다. 엘로힘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God)’으로 알고 있는 일반적인 이름이고, 야웨는 오늘 우리가 ‘여호와’로 알고 있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본래 발음에 가깝다고 이해되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이야기는 각각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 창조가, 2장은 인간 창조가 중심 주제입니다. 하늘과 땅을 이야기하는 순서도 창세기 1장은 ‘하늘과 땅(אֵ֥ת הַשָּׁמַ֖יִם וְאֵ֥ת הָאָֽרֶץ, 에트 하샤마임 붸에트 하아레츠)’으로(창 1:1), 2장은 ‘땅과 하늘(אֶ֥רֶץ וְשָׁמָֽיִם, 에레츠 붸샤마임)’로(창 2:4b) 등장합니다. 1장의 우주 창조 이야기가 하늘에서 숲을 보는 거시적 관점이라면, 2장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땅에서 나무를 보는 미시적 관점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2. 혼돈에서 질서로
창세기 1장은 제사장(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사장 한 사람인지 여러 제사장의 무리인지는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창세기 1장에서 제사장의 손길이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혼돈스러웠던 창조 이전의 우주가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1이 하나님의 창조를 선언한 후, 3절에서 창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까지의 상태를 2절은 ‘혼돈’ 즉 ‘카오스(chaos)’의 상태로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에 땅이나 물 같은 것이 있었다는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무(無)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 크레아치오 엑스 니힐로)’에 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성서 기자(記者)는 이에 대해서 굳이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하나님이 모든 것의 시작이시라는 겁니다.
혼돈의 상태였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질서정연하게 되어 갑니다. 모두 칠일 동안의 창조 이야기는 아주 조직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삼일 동안 하나님은 시공간의 원초적 배경을 만드십니다. 첫째날에는 빛을 지으시고 어둠과 구분하십니다. 둘째날에는 창공을 만드셔서 그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을 구분하십니다. 셋째날에는 뭍을 드러나게 하셔서 한쪽으로 모인 물을 바다로 구분하십니다.
다음 삼일 동안 하나님은 원초적 배경을 채우십니다. 넷째날에는 첫째날에 지으신 빛과 어둠을 주관할 빛나는 것들을 만드십니다. 다섯째날에는 둘째날에 지으신 창공과 물에서 살아갈 날짐승들과 물짐승들을 만드십니다. 여섯째날에는 셋째날에 지으신 뭍에서 살아갈 짐승들을 만드시고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십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최종적으로 안식, 즉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누리는 쉼을 향합니다(출 20:8-11; 신 5:12-15). 이 모든 질서정연한 창조 과정을 한 단어로 요약한 말이 바로 족보입니다. 새번역 성서는 족보라는 뜻의 히브리어 톨레돗(תּוֹלֵדוֹת)을 우리말 ‘일’로 번역했습니다(창 2:4a).
3. 문화명령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명령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창 1:28) 이 중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은 날짐승과 물짐승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진 명령입니다. 인간에게 덧붙여진 명령은 땅을 정복하는 것과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정복하라는 것은 아마도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 가운데서 인간이 살기 위해 땅을 개간하고 가꾸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치 봄철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얼어붙은 땅을 일구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것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 질서 있게 잘 유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농경이나 목축 문화를 나타내는 표현이 창조 이야기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여섯째날에 창조하신 것을 창세기 1장은 집짐승(בְּהֵמָה, 베헤마)과 들짐승(חַֽיְתוֹ־אֶ֖רֶץ, 하예타 에레츠)이라고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