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 사회사를 쓰려면 기독교 운동이 탄생한 바로 그 환경에서 보통 사람들이 꾸려 나간 삶의 패턴에 예전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환경을 "그리스인들의 불멸성 개념", "로마인들의 천재적 조직력", "헬레니즘 정신", 이런저런 것에 대한 "유대교의 가르침", "신비 종교"와 같이 모호한 일반성의 관점에서 묘사하거나, 고대의 귀족 저술가들이 되풀이했던 일반화와 추상화를 재생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자료와 우리 능력이 허용하는 한, 특정한 시간과 특정한 장소의 삶이 지닌 재질을 파악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초기 기독교를 연구하는 사회사가가 그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 시대 지도자와 저술가의 사상이나 자기 이해뿐만 아니라 그 환경 속에서 살던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서술하는 것이다. 27-28쪽.
1장: 바울계 기독교의 도시 환경
+ 바울은 도시 사람이었다. 도시의 숨결이 그의 언어를 통해 전해진다. 예수가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와 가라지 비유, 임차농들, 진흙으로 지붕을 만든 움막은 거름과 흙이 뒤섞인 냄새를 물씬 풍기며, 그리스어로 기록된 글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마을에서 사용하던 아람어가 종종 느껴진다. 한편 바울이 감람나무나 정원의 은유를 사용할 때는 그리스어가 유창하게 흘러나오고, 농촌보다는 학교 교실이 떠오른다. 바울은 김나시움이나 경기장, 또는 공방에서 가져온 그리스어 수사의 전형적 표현에 더 익숙한 사람 같다. 42쪽.
+ 지중해 세계 도시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부터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이르기까지 여섯 세기 반에 걸쳐 일어난 엄청난 정치 및 사회 변화의 선두에 있었다. 페리클레스 시대의 아테네는 서방 세계에 직접 민주주의라는 이상을 가져다준 폴리스가 제국의 야망을 채우는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역설을 이미 발견했다. 필리포스는 "자유" 도시 동맹들을 식민지로 삼고 조종하는 것에 대한 교훈을 잘 습득했다. 그러나 아버지보다 유명한 그의 아들은 아테네를 새로운 문화 비전을 이끌 견인차로 삼았다. 도시화는 그리스화의 수단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도 같은 정책을 추구했다. 그들은 도시를 세우거나 다시 짓고, 거기에 정식으로 등록된 시민 단체로 이루어진 그리스식 기관(demos), 평의회(boule), 그리고 자녀들을 위한 김나시움 중심의 교육 체계를 세웠다. 47쪽.
+ 로스토프체프(Rostovtzeff)는 이렇게 써 놓았다. "로마 제국은 자치도시들의 연방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꿈꾸던 화합(homonoia)보다 현실성이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서도 그리스식 도시들이 중심 역할을 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는 식민지가 상당히 쓸모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식민지들은 퇴역 군인에게 보상을 제공하고, 위험 지역에 잠재적 군사력을 공급했으며, 동부 지역의 경제를 되살렸다. 아우구스투스는 퇴역 군인을 파견해 식민지를 세웠을 뿐 아니라 다른 도시들을 세우고 다시 짓는 헬레니즘 시대 군주들의 관행을 따랐다. 48쪽.
+ 도시를 형식상 재건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초기의 최고 권력자가 속주의 도시 사람들에게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지방 정부가 강화되었다. 법정에 제소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지역법도 재판 규범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속주 총독이나 황제에게 직접 항소할 수 있는 길이 보장되면서 사법의 일관성도 증진되었다. 이는 심지어 사회 지위가 낮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정말 정의를 획득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혹은 적어도 소망을 더 널리 퍼뜨렸다. 도로가 건설되고 유지되었다. 지중해의 해적도 거의 소탕되었다. 자유시가 스스로 주화를 발행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조세 행정도 안정되어 세금을 더 공평하고 효과 있게 거두었으며, 심지어 일부 사례이긴 하지만, 잠시나마 세금을 깎아 주기도 했다. 그리스식 지방 행정과 교육 제도가 적극 권장되었고, 부유한 시민들이 도시에 기부하는 것도 적극 권장되었다. 49쪽.
+ 바워속(Bowersock)은 아우구스투스가 이미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가 대외 관계에 따른 여러 목적에 활용했던 후견 체계를 아주 노련하게 활용하여 동방 도시의 상류층과 자신 사이에 친밀한 의존 관계를 구축했음을 보여 주었다. 이 원수(princeps, 元首)는 지역 귀족들이 자신에게 바친 충성과 공식 영예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을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업과 그 자식의 사업이 더 윤택해지고 번창하게 만들어 주었다. 강력한 지역 군주가 있어 따로 속주를 조직하지 않아도 되거나, 아직은 로마가 속주를 조직하는 것이 적절치 않았던 지역에서는 원주민 출신의 왕이 로마 원수의 피후견인이 되었다. 완전한 성공을 거둔 예는 아니지만, 헤롯이 그런 사례에 해당하는 유명한 인물이자 전형이다. 헤롯은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 안에 세바스테와 가이사랴 마리티마를 비롯해 다른 고을을 세우고 열심히 재건했으며, 안디옥과 다른 외국 도시에 온정을 베풀었다. 이는 피후견인인 왕들도 로마의 제국주의와 헬레니즘과 다시화를 촉진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동시에 자신들의 야망도 키워 나갔음을 잘 보여준다. 50-51쪽.
2장: 바울계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내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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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믿음의 패턴과 삶의 패턴
+ 이 본문들에서 당시의 전형적 회심자들이 이전에 주관적 죄책감에 눌려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는 암시는 없으며, 바울이 동일한 경험을 했다는 암시도 없다. 바울은 아주 드물게 자신의 예전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이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갈 1:13-14; 빌 3:4-6). 434-4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