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德을 세우는 공동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15:1).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에게 좋을 대로만 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15:3).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서 같은 생각을 품고,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5: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15:7).


2. 이방인의 사도, 바울

바울은 예수의 이름이 알려진 곳 말고,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명예로 삼았습니다. 그는 남이 닦아 놓은 터 위에다가 집을 짓지 않으려 하였습니다(15:20).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 사람에게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 사람들로 하여금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게 하여, 하나님께서 기쁨으로 받으실 제물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5:16). 그는 자신의 그 직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15:17).


3. 전도자의 자신감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확실하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것으로 압니다."(15:29) 이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사용하시는 것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자신이 가는 곳은 어느 곳이든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있다는 자신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어떤 자아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혹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확실한 정체성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신감이 필요합니다.


4. 적용 및 기도

날마다 서로 덕을 세우는 공동체를 꿈꾸며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인간적인 유대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는 공동체를 꿈꾸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꿈 꾸었던 세상을 이루어 가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 것들을 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 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이사야 11:6~8)
1. 오직 주의 영광

믿음을 가지고 사는 모든 이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합니다. 그들은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14:8a).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14:8b).

그런데 믿음의 공동체에는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그 것은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믿음이 없는 자들을 향해서 권면이라는 이름 아래 영적 학대(spiritual abuse)를 가합니다. 학대라는 뜻의 abuse는 '남용하다'는 말입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믿음이 더 좋다는 이유로 영적인 권위를 남용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권면일 수 있으나 속으로는 믿음이 연약한 이를 죽이는 행위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주일 예배 한 번 빠졌다고 반저주를 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것은 주님께서 보시기에 너무나 안좋은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그 사람 역시 하나님께서 받아들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14:3).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비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약한 나머지 넘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것을 상관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주인 뿐입니다(14:4). 믿음이 좋은 사람이 그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 역시 주인의 종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에서 볼 수 있는 불화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종일 뿐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직 주님 한 분의 영광을 위해서 모인 공동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만이 공동체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

우리가 서로를 인정하고 작은 문제에 집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곳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다투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인 것입니다(14:17).

이 것은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속되다는 뜻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을 속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오히려 그 것들─이른바 속된 것들─이 하나님의 의를 좇아, 그분의 평화 가운데,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며,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는 믿음입니다(14:18).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누가 믿음이 좋은지 재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14:19).

믿는 사람이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선입관입니다. 우리가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선입관이 서로를 화평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일차적인 원인입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부정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부정하다고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한 것입니다(14:14).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입관때문에 형제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까짓 음식 문제 하나가지고 그 이를 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것은 그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14:15).

믿음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죄'입니다(14:23).


3. 적용 및 기도

하나님, 오늘 하루도 나의 눈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제 선입관에 의한 기준때문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의 모든 죄악들을 용서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위를 바라볼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가능한 모든 사람과 화평하도록 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1. 그리스도인과 세상 권세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의 특성이야 피안적일 수 있지만, 그 전까지는 어쩔 수 없이(!)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어야 할 진데, 그 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옳고 바르게 맺어야 함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수많은 권력이 있습니다. 작게는 가정에서의 부모의 권력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나라의 수장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권력이 있습니다. 이들 권력은 선한 권력이 있고, 악한 권력이 있습니다. 오늘 로마서 13장은 우리들에게 이 권력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권력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13:1). 따라서 이 권력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요, 거역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3:2). 이 권력에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13:4).

우리가 이 권력에 복종해야 하는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우리의 양심입니다. 단지 진노를 피하기 위한 피동적인 복종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에 의한 능동적인 복종이 있어야 합니다(13:5). 이 것은 복종하는 자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자들에게 빚을 주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이 복종의 행위야말로 사랑의 행위이며, 이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13:8~10).


2. 사랑은 율법의 완성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빚을 질 때가 있는데 이 것은 사랑의 빚이어야 합니다. 이 것은 빚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남에게 빌려주었다고 했을 때, 꼭 그 물건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그에게서 사랑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쉽게, 돈을 빌려주었다고 할지라도 그가 돈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면, 그의 마음을 받는 것으로 그치면 된다는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의 정신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13:8~10).


3. 잠에서 깨어야 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2003년은 바울이 살고 있던 당시 보다 훨씬 더 종말의 때가 가까워 진 세상입니다. 밤이 더욱 깊어졌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가까웠다고 했을진데, 200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13:11).

따라서 우리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낮에 행동하듯이, 단정하게 행해야 합니다. 호사한 연회와 술취함, 음행과 방탕, 싸움과 시기에 빠지지 맙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13:12~14a).


4. 적용 및 기도

하나님, 오늘 하루 사람들에게서 사랑의 빚을 지고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누구에게든지─그 것이 악한 권력이라고 할지라도─사랑의 빚을 지게하시고,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에 따라서 살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오실 날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만큼 가까워짐을 알게 하시고 항상 낮의 때와 같이 단정하게 행동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거룩≠세상(?)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중의 하나가 바로 거룩은 세상과는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은 바로 피안적彼岸的인 신앙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어서 천당에만 가면 된다'는 식의 신앙을 가지고 있게 되고, 결국 세상을 악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실제적으로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그렇습니다.


2. 합리적 예배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행위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그 분의 구속하심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행위입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예배의 요소이지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찬양 역시 마찬가지이며, 설교도 예배의 한 요소일 뿐 예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배의 한 부분을 담당하지만 개별적인 그 것 자체로는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들 예배를 '설교 듣는 시간'으로 착각하고 있습니까? 그 것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예배의 요소라고 하는 기도와 찬양과 설교 이에외 정말로 중요한 요소가 빠졌습니다. 그 것은 우리의 몸입니다. 몸은 그리스어로 το σωμα(토 소마)라고 합니다. 이 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몸(body)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몸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그 것이 정말로 영적이고 거룩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마음으로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수레바퀴 한 쪽을 버리고 끄는 것과 같습니다.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또한 이 몸은 실제적인 우리의 삶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허상인 그림자(η σκια, 헤 스키아)와는 다른 '실재實在'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배의 한 요소인 몸은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말입니다.

이 것은 한 주간 동안 열심히 살고 주일날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소극적인 의미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매일의 삶 속에서, 매일 출근하는 직장에서, 매일 등교하는 학교에서, 매일 잠을 자는 집에서, 매일 대하는 밥상머리에서 우리는 그 분을 전심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이 것은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이며(12:2),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서(12:1), 우리의 몸을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실 수 있도록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것이 예배입니다.


3. 예배의 정신, 사랑

예배의 정신은 사랑입니다(12:9~21).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사랑만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그 정신이 더 나아가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 사랑하고 화평하는 것으로까지 되어야 합니다(12:18). 이 사랑을 실천하는 장소 역시 교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진대, 그 장소가 교회에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해야 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열심을 내어서 부지런히 일하며, 성령으로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소망을 품고 즐거워하며, 환난을 당할 때에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쓸 것을 공급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축복하되 저주를 해서는 안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 있는 채 해서는 안됩니다(12:10~16).

가장 근본적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애써야 합니다(12:17b). 그리스도인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중의 하나가 윤리성의 부재입니다. '그까짓 인간적인 윤리 하나 지키지 않아도 나 하나 구원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은 명백히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행위입니다. 나 하나 구원 받는 건 좋은데, 나의 비도덕적 행위로 인해서 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신앙의 이름으로─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윤리종교는 아니지만 윤리는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하는 모든 행위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형제나 자매에게 원한을 들을만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형제나 자매와 화해한 다음에 제물을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마태 5:23,24).


4. 적용 및 기도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어느 순간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만 가둬놓는 불신앙을 용서하시고, 제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 곳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낸다."-1

옛 속담에 '굴러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빼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한참 사랑을 받고 있는데, 어느 날 사촌 동생이 놀러와서는 그 부모님의 사랑을 잠깐이지만 독차지 하고 있을 때, 사랑을 받고 있던 아이는 굴러온 돌 때문에 튕겨져 나간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질투가 나서 부모님한테 더 아양을 떨게 됩니다.


2. "굴러온 돌이 박혀있는 돌을 빼낸다."-2

오늘 본문 로마서 11장에도 두 종류의 돌이 나옵니다. 원래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참조, 롬 3장)과, 어느날 갑자기─갑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한 과정이지요─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을 향하여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11:11).]


3.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인류의 구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잠깐 버리신 것은 영원한 버리심이 아닙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자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11:2).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명을 남겨두었다고 하신 말씀(11:4, 왕상 19:18 인용)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그러나 조건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곧 하나님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것─하나님이 남겨두심과 선택하심─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의를 지킨 것에 대한 대가로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막무가내적 선택(이른바 예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소한의 믿음과 신의의 표시에 대한 대가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부 은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은혜입니다. 말 그대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롬 3:24).

바로 그런 믿음의 원리에 따라서 이방인인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원래의 올리브 가지들 가운데 얼마를 잘라내시고 돌올리브 나무인 우리들을 그 줄기에 접붙여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하나님을 향한 신의를 저버리거나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면 언제 줄기에서 잘려 나아갈 지 모르는 것입니다(11:17~22).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사람들에게는 준엄하십니다(에피 멘 투스 페존타스 아포토미아, επι μεν τουs πεσονταs αποτομια). 여기서 '넘어진 사람들에게(에피 투스 페존타스, επι τουs πεσονταs)'는 연약해서 넘어진 것이 아니라 죄에 걸려 넘어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9:32절에 나온 '걸림돌', 즉 믿음이 아니라 행위에 근거하여 의에 이르려고 하다가, 걸려 넘어진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준엄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인자하게 대해 주실 것입니다(11:22~24).


4.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께서 잠깐 버려두셨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방인들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5. 적용 및 기도

하나님, 오늘 하루도 제가 가진 구원의 확신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하게 하시옵소서.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교만하거나 행위의 의를 이루지 않게 하시고, 오직 믿음의 원리로 접붙임을 받은 가지로서 더욱더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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