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생즉사 필사즉생 必生卽死 必死卽生
충무공이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즉, 전쟁에 임함에 있어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자는 전쟁에 패배할 것이고, 죽을 각오를 다해서 싸우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말이다.
2. 필생즉사 필사즉생 必生卽死 必死卽生
그리스도인의 삶도 어찌보면 싸움의 연속인데 그 대상은 '죄罪'입니다. 자신을 옭아매려고 하는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면 살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6:2,3). 그러므로 신앙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힌 것입니다(6:4a). 신앙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이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그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6:4b).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목적은 우리가 살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살아서 죄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생각은, 점점 우리를 죄의 구렁으로 밀어 넣습니다. 마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점점 우리를 빨아들이는 늪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길 수─아니, 오히려 죄와는 상관이 없게 될 수─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하는 것은 죄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죄와 싸워서 이긴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말입니다.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내가 아무리 욕을 해도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 말에 반응하지도 못할(!!) 뿐더러, 내 말을 듣지도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그 유혹이 들리지 않아서 반응하지 못해야(!)합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과 반응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내가 죄에 대하여 살아있다는 말이고, 반응하지 못하는─그 유혹이 들리지 않아서─것은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6:7).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6:5). 여기서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은 원문의 의미는 '그의 죽으심과 닮은(토 호모이오마티 투 타나투 아우투to homoiomati tou thanatou autou) 죽음'입니다. 여기서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의 기본형인 호모이오마homoioma는 '닮음', '형상', '모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닮은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신 것처럼─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서 결국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자가 살 수 있습니다(必死卽生).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죄에 대하여는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6:10,11).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우리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가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우리가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6:12~14).
바울은 6장의 두 부분(1~14절, 15~23절)을 시작하면서 한 번씩 이런 논쟁의 말을 던집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6:1b)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6:15b)
이 논쟁을 던진 바울은 역시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한 대답을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메 게노이토 me genoito)."(6:2a,15c). 게노이토(기본형 기노마이ginomai)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형질, 또는 상태(영어로는 become으로 쓰입니다)를 나타내는 말로서 근본적으로 될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물이 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머무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그 기본 상태가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습니다.
또한 숙어로서 메 게노이토me genoito는 '조금도 아니다'(by no means), '상관이 없다'(far from it), '하나님이 금하신'(God forbid)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야말로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어떠한 통로를 통해서라도─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상태로서나 우리의 의지로서나 죄와는 상관이 없고, 상관하지도 말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은 율법주의적 완전주의는 아닙니다. 완전주의는 우리를 오히려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6:15). 또한 우리는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이미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6:22a).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6:22b).
3. 적용 및 기도
하나님, 저를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시고 의의 종으로 삼아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기는 제가 온전하게 죄와는 상관이 없고, 죄로부터 멀리 떨어져 하나님의 종으로서만 살아가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충무공이 왜선 133척을 전선 12척으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9월 15일 전투력의 절대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장수들의 전투의지 분발과 '결사구국'의 각오를 나타낸 말이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즉, 전쟁에 임함에 있어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는 자는 전쟁에 패배할 것이고, 죽을 각오를 다해서 싸우는 자는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말이다.
2. 필생즉사 필사즉생 必生卽死 必死卽生
그리스도인의 삶도 어찌보면 싸움의 연속인데 그 대상은 '죄罪'입니다. 자신을 옭아매려고 하는 죄와의 싸움에서 우리는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면 살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6:2,3). 그러므로 신앙인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연합함으로써 그와 함께 묻힌 것입니다(6:4a). 신앙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 이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과 같이, 그도 또한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기 위한 것입니다(6:4b).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는 목적은 우리가 살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살아서 죄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하는 생각은, 점점 우리를 죄의 구렁으로 밀어 넣습니다. 마치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점점 우리를 빨아들이는 늪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오직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이길 수─아니, 오히려 죄와는 상관이 없게 될 수─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고 하는 것은 죄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죄와 싸워서 이긴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말입니다. 죽은 사람의 무덤 앞에서 내가 아무리 욕을 해도 그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내 말에 반응하지도 못할(!!) 뿐더러, 내 말을 듣지도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죄의 유혹에 반응하지 않는(!)것이 아니라, 그 유혹이 들리지 않아서 반응하지 못해야(!)합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과 반응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반응하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 내가 죄에 대하여 살아있다는 말이고, 반응하지 못하는─그 유혹이 들리지 않아서─것은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습니다(6:7).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을 죽어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우리는 부활에 있어서도 또한 그와 연합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6:5). 여기서 예수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은 원문의 의미는 '그의 죽으심과 닮은(토 호모이오마티 투 타나투 아우투to homoiomati tou thanatou autou) 죽음'입니다. 여기서 호모이오마티homoiomati의 기본형인 호모이오마homoioma는 '닮음', '형상', '모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우리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닮은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탄을 이기신 것처럼─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서 결국 죄와의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자가 살 수 있습니다(必死卽生).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죄에 대하여는 단번에 죽고,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6:10,11).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바치고, 우리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가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우리가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6:12~14).
바울은 6장의 두 부분(1~14절, 15~23절)을 시작하면서 한 번씩 이런 논쟁의 말을 던집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6:1b)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6:15b)
이 논쟁을 던진 바울은 역시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스스로 한 대답을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메 게노이토 me genoito)."(6:2a,15c). 게노이토(기본형 기노마이ginomai)는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형질, 또는 상태(영어로는 become으로 쓰입니다)를 나타내는 말로서 근본적으로 될 수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물이 불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머무르지 않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그 기본 상태가 죄 가운데 머무를 수 없습니다.
또한 숙어로서 메 게노이토me genoito는 '조금도 아니다'(by no means), '상관이 없다'(far from it), '하나님이 금하신'(God forbid)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야말로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어떠한 통로를 통해서라도─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상태로서나 우리의 의지로서나 죄와는 상관이 없고, 상관하지도 말아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은 율법주의적 완전주의는 아닙니다. 완전주의는 우리를 오히려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은혜로만 죄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6:15). 또한 우리는 죄에서 해방을 받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의 열매를 이미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6:22a). 그 마지막은 영원한 생명입니다(6:22b).
3. 적용 및 기도
하나님, 저를 죄에 대하여 죽게 하시고 의의 종으로 삼아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바라기는 제가 온전하게 죄와는 상관이 없고, 죄로부터 멀리 떨어져 하나님의 종으로서만 살아가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認. 言+忍 > 로마서(Röm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8:1~39(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0) | 2011.08.28 |
---|---|
로마서 7:1~25(신앙인의 딜레마, 율법) (0) | 2011.08.28 |
로마서 5:1~21(하나님, 변치 않는 소망의 근원) (0) | 2011.08.28 |
로마서 4:1~25(이신득칭의以信得稱義) (0) | 2011.08.28 |
로마서 3:1~31(값싼 은혜? 값없는 은혜!) (0) | 2011.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