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대인의 특권, 할례의 의로움
유대인의 특권이자 할례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면에서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입니다(3:2b). 우리 말에는 이중 수동형이 없는지라 본문에 '맡았다'고 나왔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은 '맡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자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한 '맡았다'의 그리스어는 에피스토이테잔episteuthesan인데, 이 말의 원형은 피스튜오pisteuo, 즉 '믿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맡았다'와 '믿다'가 같은 단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신뢰도─내가 그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결정을 합니다. 만일 내가 그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을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은 바로 그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으셨기-피스튜오pisteuo'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맡기신-피스튜오pisteuo'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에 상응하는 결과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의 불의보다 크다
그런데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인지라(3:4a), 그들 가운데는 분명히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 신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하나님도 신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불의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흠집도 내지 못합니다(3:3).
오히려 사람의 불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데 좋은 이유가 됩니다(3:5a)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의 불의를 향하여 진노를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 하나님의 진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3:5b).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의 불의를 향하여 의의 진노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의의 자리에서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신실하시지 않다면, 그 분은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한 번쯤 꼬아서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라,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데 좋은 이유가 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3:7b)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죄를 짓겠다는 생각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심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지, 죄인을 심판하심으로는 영광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 3:16,17)
3. 율법과 하나님의 의
그러나 율법에 따르자면,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은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로는(실제로 율법은 상당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3:20).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은 사람들에게 죄를 인식시켜주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을 잘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들의 거짓됨을 드러내 주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 사람이나,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사람이나 다 같이 한낱 죄인일 뿐임을 나타내 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이방 사람보다 낫지 않습니다(3:9~19).
이제, 율법과는 다른─근본적인 의미는 율법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는─것이 나타났는데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8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불의를 저지르자고 하는 것은 '값없는 은혜'를 한낱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해야하는 모든 것은 '믿는 것'입니다. 그저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3:25a).
정말로 사람들의 불의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증명되었습니다(3:25b).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이렇게 스스로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의롭다는 것과 함께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까지도 의롭게 될 수 있다─오히려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3:26).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로 인해 나타나는 그 분의 의로우심 앞에서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 분의 의로우심이 심판하시는 의로우심이라면, 사람은 억울해서─실상 억울할 것이 없지만─항변이라도 할텐데, 그분의 의로우심이 절대적인 용서의 의로우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할 말을 잃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겉을 보시지 않고 모든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징표로서─굳게 세웁니다(3:31).
4. 적용 및 기도
오늘 하루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나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고 깨닫게 하시고, 그로 인해 나의 의를 드러내려는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나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인하여, 나 스스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롭게 살아가게 하시고, 나의 불의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유대인의 특권이자 할례의 의로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면에서 많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입니다(3:2b). 우리 말에는 이중 수동형이 없는지라 본문에 '맡았다'고 나왔지만, 이 말의 원래 뜻은 '맡김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자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맡기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또한 '맡았다'의 그리스어는 에피스토이테잔episteuthesan인데, 이 말의 원형은 피스튜오pisteuo, 즉 '믿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맡았다'와 '믿다'가 같은 단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신뢰도─내가 그를 믿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결정을 합니다. 만일 내가 그를 믿지 못한다면, 나는 그에게 무엇을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신 것은 바로 그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믿으셨기-피스튜오pisteuo'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맡기신-피스튜오pisteuo'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에 상응하는 결과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의 불의보다 크다
그런데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은 다 거짓말쟁이인지라(3:4a), 그들 가운데는 분명히 신실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그 신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경우도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실하지 못하다고 해서 하나님도 신실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불의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흠집도 내지 못합니다(3:3).
오히려 사람의 불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데 좋은 이유가 됩니다(3:5a)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사람의 불의를 향하여 진노를 내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그 하나님의 진노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3:5b).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들의 불의를 향하여 의의 진노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불의의 자리에서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신실하시지 않다면, 그 분은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든지 한 번쯤 꼬아서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라, 사람의 불의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데 좋은 이유가 된다는 말을 듣고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의 거짓됨 때문에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나도 역시 죄인으로 판정을 받습니까?"(3:7b)
이 말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죄를 짓겠다는 생각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심판하심으로 구원하시는 분이지, 죄인을 심판하심으로는 영광을 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 3:16,17)
3. 율법과 하나님의 의
그러나 율법에 따르자면, 하나님의 이 놀라운 계획─죄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은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로는(실제로 율법은 상당한 행위를 요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3:20).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찌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율법은 사람들에게 죄를 인식시켜주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을 잘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들의 거짓됨을 드러내 주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 사람이나,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 사람이나 다 같이 한낱 죄인일 뿐임을 나타내 주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이방 사람보다 낫지 않습니다(3:9~19).
이제, 율법과는 다른─근본적인 의미는 율법으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는─것이 나타났는데 그 것이 바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8절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불의를 저지르자고 하는 것은 '값없는 은혜'를 한낱 '값싼 은혜'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은혜를 받기 위하여 해야하는 모든 것은 '믿는 것'입니다. 그저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진실로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3:25a).
정말로 사람들의 불의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증명되었습니다(3:25b).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다가 이렇게 스스로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의롭다는 것과 함께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까지도 의롭게 될 수 있다─오히려 의롭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3:26).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용서로 인해 나타나는 그 분의 의로우심 앞에서 사람은 할 말이 없어집니다. 그 분의 의로우심이 심판하시는 의로우심이라면, 사람은 억울해서─실상 억울할 것이 없지만─항변이라도 할텐데, 그분의 의로우심이 절대적인 용서의 의로우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할 말을 잃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겉을 보시지 않고 모든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을─하나님의 은혜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징표로서─굳게 세웁니다(3:31).
4. 적용 및 기도
오늘 하루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나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고 깨닫게 하시고, 그로 인해 나의 의를 드러내려는 과오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나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인하여, 나 스스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의롭게 살아가게 하시고, 나의 불의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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