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분석
*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1:8~15)
* 복음의 능력(1:16,17)
* 사람이 짓는 갖가지 죄(1:18~32)
→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과 '복음의 능력'은 1:1~7과 이어지는 부분이고 특별한 것이 없으므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2.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크다(1:18~32)
* 흔히 죄책감은 그 것을 느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하게 합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기분이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 것이 죄를 인정하고 홀가분하게 죄값을 치르겠다는 의지가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죄를 가리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그 죄를 가리려는 노력은 죄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들어난 이후에 굴욕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 원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창조되었습니다(1:19).
바로 이 세상이 창조되던 때부터 하나님의 신성은 그 분이 지으신 만물에 내재內在되어 있고, 또 그 속성은 그 내재됨으로부터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1:20). 따라서 만물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든 사람들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나 의사들 중에서 유독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주宇宙를 연구하면 할수록, 인체人體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그 누군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의심할 수 없는 이유에서입니다. 우주와 인체의 신비神秘는 참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알맞은 도구입니다. 신비는 말 그대로 신(神)이 숨겨놓은─내재하신─(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엇이 '신비하다'고 말할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1:23).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1:22).
*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죄罪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로도 번역됨)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1:29~31).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1:32).
이러한 사람들의 모든 죄의 근본이 되는 죄는 바로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긴 것입니다(1:25).
이 것이 현 세대의 모습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없기때문에 서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욕정과 정욕과 타락한 마음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1:24,26,28).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포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포기했으므로 하나님 역시 사람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래서 마냥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당장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된 것입니다(1:18).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실 때가 행복합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큰 법입니다.
3. 적용
오늘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나에게 죄책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 자신이 그만큼 죄를 미워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감사하자. 죄책감이 들 때마다 나의 인생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민첩함도 길러야겠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역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나의 죄인으로서의 본연의 모습과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운 자아를 주신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하자.
4. 기도
오늘 하루 하나님 대신 다른 피조물이 나의 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1:8~15)
* 복음의 능력(1:16,17)
* 사람이 짓는 갖가지 죄(1:18~32)
→ '바울의 로마 방문계획'과 '복음의 능력'은 1:1~7과 이어지는 부분이고 특별한 것이 없으므로 성서를 읽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2. 죄가 깊은 곳에 은혜가 크다(1:18~32)
* 흔히 죄책감은 그 것을 느끼는 사람으로 하여금 비참하게 합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기분이 좋은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 것이 죄를 인정하고 홀가분하게 죄값을 치르겠다는 의지가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죄를 가리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그 죄를 가리려는 노력은 죄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죄가 들어난 이후에 굴욕적으로 느껴야만 하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책감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수단이 됩니다.
* 원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게 창조되었습니다(1:19).
바로 이 세상이 창조되던 때부터 하나님의 신성은 그 분이 지으신 만물에 내재內在되어 있고, 또 그 속성은 그 내재됨으로부터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1:20). 따라서 만물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든 사람들은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천문학자나 의사들 중에서 유독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우주宇宙를 연구하면 할수록, 인체人體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주와 인간을 창조한 그 누군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의심할 수 없는 이유에서입니다. 우주와 인체의 신비神秘는 참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알맞은 도구입니다. 신비는 말 그대로 신(神)이 숨겨놓은─내재하신─(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엇이 '신비하다'고 말할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 없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짐승이나 기어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1:23).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1:22).
* 이렇게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바로 죄罪입니다. 사람들은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로도 번역됨)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들이 되어버렸습니다(1:29~31).
그런가 하면 사람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1:32).
이러한 사람들의 모든 죄의 근본이 되는 죄는 바로 사람들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긴 것입니다(1:25).
이 것이 현 세대의 모습입니다.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없기때문에 서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에서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욕정과 정욕과 타락한 마음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1:24,26,28). 하나님께서 죄를 짓고있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포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기를 포기했으므로 하나님 역시 사람들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그래서 마냥 죄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이, 당장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된 것입니다(1:18).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실 때가 행복합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큰 법입니다.
3. 적용
오늘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나에게 죄책감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 자신이 그만큼 죄를 미워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에 감사하자. 죄책감이 들 때마다 나의 인생에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민첩함도 길러야겠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 역시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나의 죄인으로서의 본연의 모습과 그런 나를 사랑하셔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로운 자아를 주신 그 분의 은혜에 감사하자.
4. 기도
오늘 하루 하나님 대신 다른 피조물이 나의 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認. 言+忍 > 로마서(Röm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5:1~21(하나님, 변치 않는 소망의 근원) (0) | 2011.08.28 |
---|---|
로마서 4:1~25(이신득칭의以信得稱義) (0) | 2011.08.28 |
로마서 3:1~31(값싼 은혜? 값없는 은혜!) (0) | 2011.08.28 |
로마서 2:1~29(언행일치言行一致, 신행합일信行合一) (0) | 2011.08.28 |
로마서 1:1~7(로마의 신도들을 향한 인사) (0) | 2011.08.28 |